파란 만장 후지산 등반기
글_ 문성호
모든 건 날씨 때문이였다.
카와구치코 호수 근처에 위치한 숙소 '야마기시 료칸'에서 새벽부터 일어나 깨끗이 목욕재계를 한 것도, 료칸에서 준비해준 너무 짰던 아침 도시락을 맛도 느낄 새 없이 비워버리고 한껏 들뜬 마음으로 버스에 오른 것도, 차창을 스치는 짙은 녹색의 숲이 새삼 싱그럽다고 느낀 것도, 어느 새 맑은 공기를 뚫고 눈앞에 보일 듯 선명하고 당당하게 서 있는 3,776m 높이의 후지산을 만만하게 본 것도 따지고 보면 모두가 지랄 맞게 좋은 날씨 탓이었다.
후지산 5합목(5부 능선) 요시다 루트 구호소 앞에서 함께 간 환우들과 간단한 준비 운동을 하고 후지산 정상을 향해 첫 발을 내딛었을 때 까지만 해도 나의 발걸음은 하늘을 나를 듯 했고 나의 심장은 거친 폭주기관차의 엔진과 같았다. 바람을 가르며 정상까지 단숨에 달려가 주마. 하지만!!! 현실은 너무 가혹했다.
6합목을 지나 오르막이 시작되면서부터 다리는 무거워지고 숨이 턱 밑으로 치고 올라왔다.
설마 말로만 듣던 고산병이 벌써 오는 건 아니겠지? 아닐 거야. 잠시 멈춰서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키며 길게 숨을 쉬어본다. ‘그러게 서둘토도 잘 나가고 미리미리 산에 좀 다녔으면 좋잖아 이 바보야!!’ 저 멀리 선두그룹의 여유 있는 발걸음들을 보면서 후회가 밀려왔다. (특히 최연종 환우님께선 곧 칠순(?)을 바라보시는데도 제일 선두에서 오르셨다)
다시 숨을 고르며 2000m 아래 능선을 따라 펼쳐진 푸른 하늘과 그 아래 목화솜처럼 새 하얀 구름밭의 풍경을 보니 꺼져가던 나의 엔진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자 걸어보자. 걸었다. 복잡했던 서울살이의 생각들, 투병생활들, 가족들의 모습들이 하나 둘 씩 스치면서 걷고 또 걸었다. 이젠 거의 다 왔겠지 고개를 들어 보면 후지산 정상은 바로 코 앞에 보이는데 사막의 신기루마냥 아무리 걸어도 간격은 좁혀지지 않고 계속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 사이 함께 등반을 시작한 환우들의 모습들은 하나 둘씩 사라지고 어느 순간 내 옆에는 사무국직원인 천이화 양만이 남아있게 되었다. 처음엔 반신반의 했었다.
사실 이은영 사무처장님을 제외하고는 유일한 여성 멤버인데다가 정상에 오르기엔 체력적으로도 무리가 될 수 있어 이미 포기하고 산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을 줄 앍았었는데 밝은 모습으로 옆에서 동행하게 돼서 무척 반가웠다. 정상에 오르는 모습들을 카메라에 담아야한다는 사무처장님의 무언의 압박?도 한 몫을 한 것 같았다.^^
산에 오르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할까?
햇살은 눈부시고 바람은 땀을 식히기에 적당하고 함께 오르는 동행까지 있으니 저절로 힘이 났다. 천이화 양의 20대의 일과 사랑 그리고 꿈에 대한 열정들과 삶의 고민들, 나의 40대 가장으로써 지나온 사랑과 꿈들, 그리고 삶의 무게들을 서로 나누며 오르다 보니 어느 새 8합목산장에 까지 도착해 있었다. 시간을 보니 12시 가까이 되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지금쯤은 후지산 정상에 도착해서 다같이 분화구 주위를 한번 돌고 점심을 먹었어야 했을 시간이었다.
아~ 이걸 어찌한다? 나랑 이화양이 서 있는 8합목에서 후지산 정상까지는 우리 두 사람의 등반 속도로 봐서는 적어도 3시간 이상은 걸릴 것 같고 환우들과 약속된 시간을 지키려면 아무래도 정상은 포기하고 여기서 점심을 먹고 정상에서 내려오는 환우들을 기다렸다 다시 내려가는 게 좋을 듯싶었다.
“어떡할까요? 이화씨?”
“글쎄요?” 이화양은 순진한 눈망울을 깜빡거리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또 다시 그 지랄 맞은 구름들은 천국의 문으로 뻗어있는 양탄자처럼 나를 유혹했고 때 마침 주저하고 있는 나를 비웃듯 새 한 마리가 유유히 하늘을 가르며 후지산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야, 진짜 날씨 한번 죽이네!! 우리 조금 늦더라도 그냥 올라갑시다.
여기서 포기하면 분명히 나중에 후회할 거 같아요.”
나의 충동적이고 무대포적인 감상으로 순진한 이화양을 꼬드겨 본격적인 고난의 산행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이 충동적인 결정이 나중에 엄청난 쓰나미를 일으킬 줄 도 모른 채.
“헉! 헉! 헉! ”
나와 이화양은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말을 하며 오를 수 없었다.
숨은 이미 턱을 지나 코 밑까지 와 있었고 다리는 천근만근 이였다.
한마디로 정말 죽을 것 같았다. 네 걸음 오르고 쉬고 세 걸음 오르고 쉬고......
내가 쳐지면 이화양이 앞장 서고 이화양이 쳐지면 내가 앞장서고를 반복하며 내가 왜 계속 오르자고 했을까 후회가 들기도 했다.
이번 만 오르면 정상일거야 하고 올라가면 얄밉게도 정상은 딱 그만큼 물러나 있었다.
이런 속도로는 정상까진 정말 안될 거 같았다. 그렇다고 내려가기엔 또 너무 많이 올라왔다.
진퇴양난에 빠진 것이다. 갑자기 다리에 힘이 쫙 빠졌다. 주저앉았다. 더 걸을 힘도 없었다.
바로 그 때였다.
“혼또니.... 조또..... 간빠데 구다사이.....”
낯선 일본말이 귀에 꽂히듯 들려왔다. 고개를 들고 올려다보니 하산하던 일본인 중년 부부가 지쳐있는 나와 이화양의 모습을 보며 격려 차원에서 건넨 말이었다.
그냥 지나가는 말투가 아닌 진심이 느껴지는 목소리와 표정이었다.
일본어를 모르는 나에게도 그 진심만은 느껴질 수 있었다.
내 귀엔 마치 “얼마 안 남았으니 조금만 힘을 내세요! 할 수 있어요.” 라고
한국말처럼 들려왔다.
그 순간 영화 속에서나 나오는 장면처럼 뜨거운 무언가가 내 속에서 일어났고 ‘아 정상까지 갈 수 있겠구나.’ 라는 확신이 생겨났다.
마지막 젖 먹던 힘까지 짜내 마침내 정상에 올랐을 때의 기쁨이란!!
나와 이화양은 감격에 겨워 서로를 격려하며 그 동안 고통스럽게 올라온 길들을 내려다보며 잠시 정상을 밟은 자의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모든 게 완벽했다. 이렇게 후지산 등반은 여기서 해피엔딩으로 끝날 줄만 알았다. 그러나!!!!
정상에서의 짧았던 감상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후지산 정상엔 반겨줄 환우들의 모습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고 해는 이미 낮아지고 있었고 바람마저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아차!! 그제서야 산 밑에서 기다리고 있을 환우들 생각이 났고 예약된 저녁을 먹으려면 6시까지는 내려가야 했다. 시계를 보니 벌써 5시였다. 으아악~~~~~~~!!
나와 이화양은 정신없이 내려가기 시작했다. 마음은 우샤인 볼트처럼 빠르게 달려 내려가 충분히 1시간이면 내려갈 것 같았지만 (본래 하산시간만 4시간 이상이 걸리는 코스였다) 다리는 이미 풀릴 대로 풀려 제대로 걷기조차 힘들었다.
설상가상으로 밧데리를 아낀다는 차원에서 휴대 전화기마저 꺼놓은 걸 잊고 있었다.
나와 이화양이 허겁지겁 내려오고 있을 바로 그 시각, 이미 하산해서 산 밑에 우리 두 사람을 기다리던 사무국 직원 분들과 환우 분들은, 정상에 우리를 본 사람도 없고 전화 연락마저 되지 않자, 급비상 상태가 되고 말았다.
‘조난된 거 아니야?’ ‘몸 상태도 안 좋은데 어디 쓰러져 있는 거 아니야?’
한번 생각해보시라, 멀리 타향에서 그것도 해발 3,776m 산에서 말 그대로 투병중인 백혈병환자와 체력 약한 여자직원이 동시에 없어졌고 전화도 안 되고 또 두 사람이 함께 있다는 정보조차 없었으니 얼마나 아찔한 상황이였겠는가? 급히 조난신고를 하고 구조 방송을 하려고 분주히 뛰어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나와 이화양은 산 아래에서 상황이 그렇게 급박하게 돌아가는 줄은 전혀 모른 채, 금세 어두워져 가는 하산길을 헤드랜턴도 없이 내려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핸드폰 후레쉬라도 켤 요량으로 전화기를 꺼냈을 때 마침 통화를 시도 중이던 사무처장님과 이화양이 극적으로 연결되었고 우리 두 사람을 찾기 위해 막 구조방송을 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정말 그 순간엔 쥐구멍이라도 있었으면 들어가고 싶었다.
환우들의 안전을 책임져야할 사무국 직원 분들의 염려와 기다리고 있을 환우들께 미안한 마음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곧이어 우리를 구조하기 위해 그 즉시 안기종 대표님과 권순철님과 김진환님 이렇게 후지산 구조대 3인조가 편성되어서 산 아래에서 우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고 핸드폰 불빛에 의지해 어둠 속을 내려오던 나와 이화양은 멀리 보이는 후지산 구조대의 불빛을 발견하고는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쉴 수가 있었다. 그때만큼 작은 불빛 하나가 그렇게 아름답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그 순간 만약에 희망이라는 단어를 눈으로 볼 수 있다면 바로 저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짧게 스쳤다. 미안하다는 우리 두 사람의 말에 환하게 웃어주며 무사하니 괜찮다고 덕분에 밤 산행을 하게되어 오히려 고맙다고 하는 후지산 구조대 3인조의 말에 또 한 번 감동 먹었다. 아름다운 사람들에게 하늘이 선물을 주신 걸까?
하산 길에 머리 위로 쏟아지는 별들과 바로 눈앞에서 보는 듯 커다란 북두칠성을 본 것은
그때의 모두에게 평생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거 같다.
이렇게 나의 파란만장 후지산 원정기는 결국 해피엔딩으로 끝이 났다.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이야기해주니 묻는다.
“만약에 똑같은 상황이 다시 생기면 어떡할 거야? 정상에 오를 거야 그냥 내려올 거야?”
“글쎄.....그때 날씨를 봐서.”
모든 건 지랄 맞게 멋진 날씨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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