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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골 최 2019. 2. 3. 20:58


되찾은 음력설, 어쩌다 우리는 설날에서 멀어졌나?

조원일 입력 2019.02.03. 10:07 수정 2019.02.03. 12:09

               

야광귀ㆍ토끼날ㆍ투석전…우리가 몰랐던 설날 이야기

※‘오리지너’는 현상부터 근원까지 이야깃거리를 몽땅 끄집어 내고 싶은 한국일보의 멀티 플랫폼 스토리텔링 콘텐츠입니다. 텍스트, 비디오, 데이터 등등. 가능한 모든 도구로 사람과 사회, 역사와 현상을 연결지어 보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2주에 한 번, 일요일 오전에 찾아 뵐게요.

◇야광귀

“야광이라는 귀신이 있다. 밤에 인가에 들어와 신을 훔치기를 좋아한다. 그러면 신 주인은 불길하다.” (유득공 ‘경도잡지’)

“해질 무렵에 모아둔 머리카락을 태우고 밤에 신발을 감춘다. 신발을 잃으면 ‘재악(灾惡)’이 있다.” (조수삼 ‘세시기’)

“이날 밤에 신발을 문 밖에 두면 야귀왕이 하늘에서 내려와 아이들의 신을 두루 신어보고 발 크기가 맞으면 그 신을 신고 간다. 신발을 잃어버린 아이는 운수가 좋지 않다고 하여 분주히 방 안에 신발을 감춘다.” (조운종 ‘세시기속’)

250여년 전 조선 실학자들이 작성한 문헌에는 한 해 마지막 날인 음력 섣달 그믐의 ‘밤손님’이 등장합니다. 조선 후기 최고 지성들이 남긴 일종의 ‘민간 트렌드’ 보고서였습니다. 일본에도 있다고 알려진 야광귀 신앙에서뿐만 아니라 동북아 지역에서 신발은 전통적으로 한 개인을 상징했습니다. 운수가 불길하다는 것은 아프거나, 다치거나, 혹은 죽는다는 것을 의미했죠.

하지만 요괴의 정체는 묘연합니다. 야유광, 야광신, 야귀할멈, 앙광이 등 이름도 다양했던 그것을 두고 누군가는 불타 죽어 꺼멓게 탄 살과 뼈만 남은 고통스러운 사람의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또는 음식을 먹지 못해 바짝 여윈 구귀(아귀)의 모습, 또는 얼굴이 흉측한 불교의 약왕보살이라고도 하죠.

굶주리는 귀신 아귀(가운데)를 그린 불화. 직지성보박물관 홈페이지 캡처.

수백년이 흐른 지금, 근원 모를 이야기를 규명하기엔 막연하다면, 질문을 비틀어 보는 건 어떨까요. 어쩌면 ‘야광귀의 정체는 무엇인가’에서 ‘야광귀 얘기를 들은 사람들은 무엇을 했나’라고 물을 때 실체에 좀 더 다가갈지도 모릅니다.

“어린아이를 일찍 재우기 위해 만들어 낸 말”이라던 유득공이나, “부녀자들이 크고 작은 신들을 모두 깊숙한 곳에 감춘다”고 했던 최영년(해동죽지)의 기록에서 힌트를 찾을 수도 있겠습니다. 야광귀의 공포가 클수록 본격 농사철을 앞둔 정초엔 야간 외출이 금기였습니다.

오늘 ‘오리지너’는 새해 밤을 장악했던 야광귀의 의미를 묻는 것처럼, 조금은 낯선 이야기들로 설날을 조명해 보려 합니다.

◇새해의 시작은 온통 ‘금기’였다

설이 언제부터 명절이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우리 설날 관련 최초 기록은 7세기 중국 역사서에 등장합니다. 하지만 흔히 음력이라 부르는 태음태양력의 첫 날이 한 해 농사 준비의 시작점을 의미하는 걸 볼 때 농업혁명이 진행되고 역법이 도입된 후부터 설이 명절이 됐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역법에 따라 해마다 반복되는 풍습을 세시풍속이라고 하는데, 이는 곧 농경의례였습니다.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 때 확립된 한국 세시풍속은 음력 1월인 정월에 몰려 있습니다. 대부분 ‘해서는 안될 일’을 말하는 것이 눈에 띕니다. 이를테면 전라도 지역에서는 정월에 홍역 같은 전염병이 돌아 사람이 죽더라도 시신을 땅에 묻어서는 안 된다고 믿었습니다. ‘지신이 놀라 동티가 나면 불길한 일이 생긴다’고 믿었기 때문이죠. 또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창호지 등 문틀에 종이를 바르면 복이나 재물이 들어오지 않아 엄동설한에도 구멍이 뚫린 채 놔둬야 한다고 전해지기도 했습니다.

특히 설날을 시작으로 대보름까지 이어지는 동안의 정초 십이지일(十二支日)은 농경사회에서 공포와 경계의 대상이 무엇인지, 공동체의 성격이 어떤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십이지신

새해 처음으로 맞는 쥐날인 ‘상자일’에는 옷을 지어 입으면 쥐가 쏜다고 해서 아낙네들이 길쌈이나 바느질을 꺼렸습니다. 첫 소날인 ‘상축일’에는 소에게 일을 시키지 않고 좋은 여물을 많이 줘야 합니다. 첫 뱀날인 ‘상사일’은 불길한 날로 인식돼 장을 담그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가장 두드러지는 금기는 여성들에 대한 행동 규제였습니다. 설날부터 대보름까지 여성들이 집밖으로 나가는 것은 매우 불경한 일로 인식됐죠. ‘서로 왕래를 삼가며 특히 여자는 외출을 삼간다(첫 호랑이날)’, ‘남자가 먼저 일어나서 대문을 열어야 한다(첫 토끼날)’ 등의 금기가 그것입니다. 양반가의 여인들은 남의 집에 인사를 갈 수 없어 몸종을 대신 보내기도 했다고 합니다. ‘세배를 보낼 때 여자아이들을 먼저 보내면 그 집에서 키우는 닭이 성하지 않는다’, ‘농사가 망한다’ 식의 억측에 기인해 대보름이 지나고 2월이 오도록 여성들의 바깥 출입을 곱지 않게 보는 시각이 다수였습니다.

반면 남성은 ‘상가에 다녀오거나 개고기를 먹은 남자는 부정이 들어 남의 집에 출입하지 못하게 한다’와 같이 구체적인 행위에 한정해 금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국립민속박물관이 발간한 한국세시풍속사전은 정월에 행해지는 수많은 금기가 한 해의 시작을 순조롭게 하는 데 있었다고 분석합니다. 농한기를 보내는 동안 가족과 사회의 불길하고 위험한 일을 차단하기 위해서라는 것이죠.

그러나 과거 어떤 문헌에도 전염병으로 인명이 상하는 지경에 시신 매장조차 거부하며 걱정하는 정초의 불길함이 무엇인지, 여성이 먼저 세배한 집의 닭이 정말 병들거나 죽었는지에 대한 근거는 없습니다. 흉작에 따른 굶주림과 역병으로 인한 환란은 언제나 공포였습니다. 농경사회를 늘 지배하던 그 공포의 규명은 야광귀만큼이나 아득했던 나머지, 근거도 불확실한 온갖 금기를 만들어 피해보려 했던 것이겠죠.

석전을 진행중인 과거 서울의 모습을 찍은 사진을 바탕으로 영국의 한 판화작가가제작한 작품.

◇전쟁 같은 ‘마을 놀이’

설날 차례와 세배라는 가족의례로 시작됐던 과거 새해 풍속은 정월대보름이 가까울수록 공동체 의식의 성격이 강한 놀이로 변환됩니다. 섣달 그믐부터 시작하는 연날리기와 윷놀이 같은 소규모 놀이가 대보름의 줄다리기,달집 태우기 같은 마을 단위 규모로 확대됩니다. 가족과 집단의 안녕을 기원하며 새 봄을 준비하는 따뜻한 모습이 그려지실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상상을 초월하는 놀이도 있었습니다.

“바야흐로 싸움이 한창 심해지면 고함소리가 땅을 흔들 정도가 되며 머리를 싸매고 서로 공격하는데 이마가 터지고 팔이 부러져 피를 보고도 그치지 않는다. 그러다가 죽거나 상처가 나도 후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생명을 보상하는 법도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돌이 무서워 피하고, 관에서 특별히 금지시키는 조치를 취하지 않지만 고질적인 악습이 되어 고쳐지지 않는다.”

조선후기 ‘동국세시기’에 적힌 석전(石戰), 즉 돌팔매질 놀이에 관한 기록입니다. 한양의 남대문과 서대문 등지의 주민들이 떼를 지어 편을 가른 다음 몽둥이를 휘두르거나 돌을 던졌던 석전을 묘사한 것으로, 상대를 몰아내는 마을에는 그 해 풍년이 든다고 합니다. 명종실록에는 1555년 5월 왜구가 침략해오자 김해의 석전꾼 100명을 뽑아 보내 방어하게 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2011년 2월 16일 오후 서울 서초구 양재천에서 열린 정월대보름 달집태우기 축제에 참가한 시민들이 한 해 소원을 빌고 있다. 홍인기기자

‘횃불싸움’도 있습니다. 해충을 없애 풍년을 기원한다는 의미로 논두렁을 태우는 쥐불놀이의 ‘확장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쥐불이 크게 일수록 풍년이 오며 곡식에 해를 입히는 쥐를 몰아 낸다고 믿었던 탓에 마을마다 불길을 키우다 맞닥뜨릴 때, 놀이는 싸움이 됐습니다. 흡사 전쟁을 방불케 한다는 청년들의 횃불싸움은 휘두르는 홰에 맞아 화상을 입는 부상자가 속출하기도 했습니다. 주먹질과 발길질도 함께 오갔던 횃불싸움이 석전으로 번지는 일도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민속학자들에 따르면 대보름을 전후해 진행됐던 집단적 놀이, 대동놀이는 마을의 일체감을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인간의 근력이 영농의 기본이었던 시절, 모내기를 비롯한 집단 노동이 불가피했던 환경에서 공동체 놀이가 마을 주민 단합에 적잖은 힘이 됐기 때문입니다. 석전이나 횃불놀이 같은 격렬한 ‘놀이’에서는 자신들의 경작지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 간의 강한 배타적 성격도 엿보입니다.

나아가 새해 전반을 관통하고 있는 각종 금기는 농한기 동안 벌어지는 온갖 놀이가 농사라는 지상의 목표에 기여할 수 있도록 제어하는 기능을 동시에 담당했던 것이기도 하죠.

하지만 국가와 사회의 근간이 언제까지나 과거의 농경 문화에 머무를 수는 없었습니다.

◇‘금기의 명절’ 설날을 금한다

미신에 가까웠던 금기에 지배당하고 경작지를 중심으로 주거가 묶여 있는 사람들. 농경사회 문화의 집약체라고 볼 수 있는 정월 풍속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발전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됐습니다. 대대로 행위에서 행위로 이어진 전통의 음력 설날을 고수하려는 사람들과, 생산 시스템의 변혁을 바라며 위정자들이 안착시키려 했던 양력 설날의 100년 넘는 갈등이 시작된 것입니다.

1895년 “역법을 개정하여 태양력을 사용하고, (조선) 개국 504년 11월 17일을 개국 505년 1월 1일로 삼으라”는 고종 황제의 조칙이 처음이었죠.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전환을 시작해야 할 시기, 우리가 남기고 바꿔야 할 풍습은 무엇인지를 모색할 첫 기회였지만 무산됩니다. 뜻하지 않게 음력 설 문화는 외세와 권력자들의 부당한 간섭에 대응하는 민족 저항의 상징으로 거듭나게 되죠.

한국일보 자료사진.

우선은 일제 식민지 때문이었습니다. “총독부는 (양력과 음력 설을 두 번 쇠는) 이중과세를 피하려 (중략)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실행시키기로 되었다. 첫째 음력 정월 초하루에는 각 가정의 다례를 고려해 조선인 관서에는 조퇴를 묵인해 주고 학교 아동생도들에게 아침 상학(수업)을 늦게 시작하고 오후에는 폐과하는 예가 있었으나 금년은 이것을 절대로 폐지, 금지할 것. 둘째 음력 정월 초하루에는 각 지방에 따라 적당한 부역과 청결 등을 일반에 실행시켜…” (1938년 1월 29일자 동아일보)

‘내선일체’를 주장했던 일제의 시각에서 우리의 음력설은 구정으로, 그들이 말하는 신정보다 낙후된 전근대적 전통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몸에 밴 전통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국가기록원에 따르면 일제의 정책에도 불구하고 음력 설만 되면 상점은 2~3일씩 문을 닫았고 관공서 직원들도 출근을 하지 않자 떡방앗간 조업까지 강제로 금지시켰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하지만 광복 후에도 설날에 대한 ‘천대’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1949년 이승만 대통령은 3ㆍ1절, 제헌절, 광복절, 심지어 크리스마스도 법령상 공휴일로 지정하지만 음력 설은 제외합니다. 반면 양력 설은 1월 1일부터 3일간 연휴가 됐습니다. 6ㆍ25 전쟁 당시 국내에 머물렀던 한 미국인 인사는 “이승만 대통령이 음력 설을 지적하며 ‘민족의 수치’라고 표현했다”는 말을 전하기도 합니다.

1954년 당시 국무총리실이 총무처에 음력 설날을 강력하게 단속할 것을 지시하는 문서. 음력 설날을 폐습적인 이중과세로 규정하고 시간소비와 물자낭비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

박정희 정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승만 정부 때도 있었던 음력 설 임시열차 증편 운행을 중지해 도시 노동자들의 귀성이 더 어려워지기도 했고 ‘구정프로’ 등 음력 설을 강조하는 극장 홍보물 제작도 금지됐습니다. 음력 설을 지내는 흐름이 계속 이어지자 결국 전두환 신군부는 ‘민속의 날’이라는 궁여지책으로 하루짜리 공휴일을 지정합니다. 그리고 1987년 6월 항쟁을 거친 89년, 음력 설은 105년 만에 공식적인 명절의 지위를 되찾게 됩니다. 앞서 1988년 국민 84%가 음력 설을, 11%가 양력 설을 지낸다는 한국갤럽의 여론조사 결과는 한 세기가 넘게 이어진 ‘설날 분쟁’의 승자가 누구인지를 확연히 보여줍니다.

◇2019년, 서른살 설날

1989년 이후의 설날 풍경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모습들입니다. 기차표를 끊으려 길게 줄을 늘어선 사람들의 모습, 주차장을 방불케 하는 고속도로 귀성길 정체, 세뱃돈으로 줄 신권 마련을 위해 은행을 찾는 사람들, 차례상 위의 떡국, 조상들의 묘지 위를 촬영하는 방송국 헬기의 카메라를 보고 손 흔드는 성묘객, 설빔을 차려 입고 고궁을 찾아 윷놀이를 하는 가족.

1987년 음력 설을 맞아 서울역 광장에 구름떼 같은 사람들이 몰려 있다. 고향으로 출발하기 위한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가득하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하지만 사람들이 양력보다 음력 설을 선호했던 것과는 별개로 전통의 설 문화에는 균열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설 문화의 본질이 농경사회의 풍습이었던 걸 떠올린다면, 너무 오랜 동안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었던 셈이죠.

“건축설계사무소에 다니는 회사원 이모씨는 설날 연휴를 맞아 지난 4일 오후 친구 3명과 함께 용평리조트에 갔다가 두 번 놀랐다. 우선 생각 밖의 엄청난 인파 때문이다. 다음은 인파 대부분이 가족 단위의 여행객들인 점이었다. (중략) 이제 설날도 고향을 찾는 명절이기보다는 놀고 즐기는 황금연휴가 되고 있음을 절감했다.” (1989년 2월 11일자 동아일보)

5일간의 설 연휴가 시작되기 하루 전날인 2월 1일 인천국제공항에 출국 인파가 몰리고 있다. 이한호 기자

전근대사회의 ‘을’이었던 여성의 목소리도 누르기만 할 수 없게 됐습니다.

“추석을 이틀 앞두고 김영주씨는 며느리 사표를 썼다. ‘뺨 맞고 욕먹을 각오로 했어요. 아버님 어머님이 네가 한 게 뭐가 있냐고 노발대발 하시면 저는 이혼할 각오였으니까요.’”(2018년 2월 26일자 한국일보)

[저작권 한국일보]

잔소리도 거부하기 시작합니다. 수백년간 가장 완벽하게 계승되고 있는 ‘올해는 아들을 낳게’, ‘과거에 급제하게’, ‘시집을 가게’ 같은 덕담이 그 표적입니다.

“설 당일인 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충신동의 한 주택. 20, 30대 젊은이 8명이 저녁을 먹기 위해 다섯평 남짓한 작은 방으로 모여 들었다. (중략) 요즘 유행하는 소셜다이닝(socialdining)이다. (모임을 주최한) 김씨는 ‘명절만 되면 사촌, 지인과 비교하는 말에, 결혼은 언제 하느냐 등 쏟아지는 걱정에 신물이 난 또래들을 위로하기 위해 자리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2016년 2월 11일자 한국일보)

한국학중앙연구원이 말하는 과거 세시풍속의 의의는 ‘생기를 북돋우고, 활력을 주는 생활의 마디’입니다. 축제 같은 풍속들은 지난 한 해 고된 노동으로 쌓인 긴장을 풀고 여유를 주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물론 생존에 필요한 지식이 채 정렬되지 않아 경험 많은 연장자의 권위가 절대적이었던 시대, 근육의 양을 미덕 삼아 남성 농부가 우위를 점하던 시대, 닥쳐올 재난을 극복하기보다 금기로 구속하고 귀신을 두려워해야 했던, 그런 시대들에 적합한 산물이었겠죠.

어쩌면 세상의 축이 농경에서 산업으로 바뀌는 동안, 민족과 국민의 정서적 구심점이 절실했던 순간이라는 이유로 우리는 마땅히 했어야 할 설 명절에 관한 질문들을 미뤘는지도 모릅니다. ‘설날 아침 차례는 우리 가족 모두에게 생활의 마디가 되고 있는지, 세배 후 모여 앉은 가족의 면면은 각자의 긴장을 풀어주고 있는지, 내가 먹은 떡국은 몰아주기 노동의 결과물은 아닌지.’

되찾은 설날이 서른 번째 생일을 맞이하는 2019년 2월 5일에는, 이런 질문의 답을 한 번쯤 생각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이상 ‘오리지너’였습니다.

조원일 기자 ㆍ김창선 PD ㆍ자료조사 박서영 ㆍ이현경 인턴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