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의 산업혁명, '3D 프린터 태풍' 온다 본문
영화 '클라우드 아틀라스'(2012년)에는 3D 프린터의 진화를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장면이 등장한다. 감독은 복제인간 '손미 451'(배두나)이 일하는 패스트푸드점 '파파송'에서 다채로운 재료들이 스프레이처럼 뿌려지며 순식간에 음식이 '프린팅' 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3D 프린터가 뼈, 혈관 등을 재생하는 수준까지 진화한 현 시점에서 보면 그리 먼 얘기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최근 들어 보급이 본격화된 3D 프린터는 세계 산업계 지형도를 바꿀만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반면 실물경제를 지탱하는 제조업의 기반붕괴를 우려하는 시각도 만만치 않다. 또 개인에게 '무한대'의 창조 여건이 주어지는 만큼 3D 프린터를 이용한 무기제작, 사기 등의 범죄를 우려하는 시선도 크다. < 뉴스토마토 > 는 총 3회에 걸쳐 3D 프린터 산업 동향과 향후 세계경제, 산업지형에 미칠 영향을 모색해 본다. (편집자)
◇3D 프린터로 제작한 이식 수술용 두개골 모형.(사진=OsteoFab)
3D 프린팅 기술은 이미 모든 사물을 복제 가능한 수준에 이르렀다. 최근 미국 코네티컷 주에서 3D 프린터로 제작한 두개골 임플란트를 환자에게 삽입하는 수술이 성공리에 이뤄졌고, 독일에서는 비행기까지 제작할 수 있는 초대형 3D 프린터까지 등장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말대로 '제3의 산업혁명'이 눈앞에 도래한 셈이다.
기술적 혁신과 함께 3D 프린터의 대중화도 속도를 내고 있다. 통상 3D 프린터는 높은 가격 때문에 영세기업, 일반가정 등이 가지기 어려웠지만 최근에는 100만원대의 저렴한 3D 프린터도 판매되고 있는 상황. 초정밀 인쇄작업이 가능한 기업용 프린터도 수년 내 200만~300만원 수준으로 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최대 걸림돌이었던 가격 문제가 해결되면서 보급화에 속도를 내고 있는 것이다.
30여년 전 처음 등장할 당시 시장은 충격이었다. 3D 프린터는 컴퓨터로 만든 디지털 디자인 설계도를 바탕으로 3차원의 물체를 정확하게 찍어내는 혁신성을 선보였다. 어떤 제품이든 설계도만 있으면 고무, 나일론, 플라스틱, 스테인레스 스틸, 티타늄, 체세포 등 다양한 재료를 활용해 하루 안에 생산할 수 있다. 혁명으로 불린 이유다.
3D 도면을 설계하는 작업도 갈수록 편리해지고 있다. 구글 등 일부 IT 기업들은 비전문가도 자유롭게 3D 도면을 제작할 수 있는 도구를 지원하기에 이르렀다. 머지않아 일반인들도 전문적인 교육 없이 원하는 방식으로 실물을 3D로 스캔해 직접 제품을 생산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생각이 곧 제품으로 연결되는 '창조'인 셈이다.
또 3D 프린터는 재화의 생산 방식뿐만 아니라 질적 수준까지 끌어올려 새로운 사업 영역을 개척할 것으로 기대된다. 시장조사업체인 가트너는 최근 발간한 보고서에서 "3D 스캐너 및 디자인 도구의 발전이 향후 제조 분야를 포함해 건축, 엔지니어링, 토목, 의료 등으로 확장되어 갈 것"으로 예상했다. 가히 전 산업분야로 발을 넓혀 나간다는 얘기다.
◇네덜란드의 3D 프린팅 기업 셰입웨이즈(Shapeways)는 일반인이 간편하게 2D 이미지를 3D 도면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서비스를 하고 있다. (사진=셰입웨이즈 홈페이지)
◇3D 프린터, 새로운 미래 산업을 디자인하다!
무엇보다 3D 프린터가 '제3차 산업혁명'을 일으킬 것으로 예견되는 이유는 기존 제조업과 달리 산업별, 품목별로 '생산거점'이 불필요하다는 특성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기업이 담당하는 사회적 기능뿐만 도시의 기능, 국제 무역 등 다양한 영역에서 지각 변동을 일으킬 핵심 변수로 떠올랐다.
세계 3D 프린팅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네덜란드의 셰입웨이즈(Shapeways)는 디자이너나 제작자들을 위한 3D 프린팅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3D 프린팅 제품을 거래하는 '마켓 플레이스' 역할도 수행하고 있다. 아이폰이나 안드로이드 마켓을 떠올리면 된다. '3D 프린팅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는 셰입웨이즈는 지난해 기준 총 15만명의 유저를 기반으로 연간 120만개의 제품을 프린팅하고 있다.
이보경 KT경제경영연구소 연구원은 "셰입웨이즈는 (3D 프린팅을 통해) 제품 디자인, 판매, 제조, 배송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통합 서비스를 제공한 중요한 기업 사례"라며 "앞으로도 3D 프린팅 사업은 제품 생산 및 유통 등을 통합한 대기업의 사업 형태 또는 특정 분야에 특화된 '전문기업' 방향으로의 발전이 예상된다"고 말했다.
미국 실리콘밸리도 3D 프린터 산업과 관련한 전문가들의 전망이 구체화되고 있는 대표적인 장소 중 하나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최근 들어 실리콘밸리 내에 3D 프린터 관련 창업이 급증하고 있다. 또 3D 프린터의 도움으로 제조 여건이 크게 달라지면서 창업 비용이 최대 20배 이상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기존 대기업 중심의 대량생산 체제에서 어려웠던 혁신적이고 다양한 제품의 등장도 관심을 끌고 있다. 홍일선 LG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최근 보고서를 통해 "3D 프린팅의 확대는 제품 디자인의 혁신으로 이어질 것"이라며 "디자이너들이 생산 기술에 의한 제약 없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셰입웨이즈도 네덜란드의 전자 대기업인 필립스(Philips) 디자인 부서의 핵심 디자이너들이 독립해 설립한 '스타트업' 기업이다. 필립스는 '필립스 라이프 스타일 인큐베이터'라는 협력 프로그램을 통해 셰입웨이즈의 혁신적 아이디어가 현실화되도록 지원했고, 결국 대기업과 벤처기업 간 협력을 통한 성공사례를 구현하는데 성공했다.
◇사업계 전반으로 뻗어나가는 제조업의 새로운 바람
◇프라운호퍼 IGB 연구소가 3D 프린터를 활용해 개발에 성공한 인공혈관.(사진=프라운호퍼 IGB 연구소 홈페이지)
이전까지는 3D 프린터를 통해 제조, 판매되는 제품이 액세서리 등으로 일부 한정돼 있지만 마이크로미터 단위 제품을 생산하는 초정밀 3D 프린터의 보급이 빨라지면서 제조업이 접근할 수 있는 영역이 점차 넓어지는 추세다. 특히 의료기기 분야에서는 최근 나노미터 단위의 세부구조를 가진 초정밀 제품들도 잇달아 등장하고 있다.
심장 혈관에 삽입하는 금속 그물망인 스텐트(stent), 통증 없이 주사를 놓을 수 있는 마이크로 바늘(microneedles), 수 마이크로미터 단위로 게코도마뱀(gecko)의 발바닥을 모사한 접착제 등이 대표적이다. 신생기업 '나노스크라이브'(Nanoscribe)는 미세하게 레이저를 조정하여 30나노미터 단위의 구조물을 생산할 수 있는 3D 프린터를 선보이기도 했다.
인공장기나 인체조직을 만드는데 3D 프린팅을 사용하는 바이오프린팅(Bioprinting)도 주목을 끈다. 최근 독일의 연구기관인 프라운호퍼 연구소(Fraunhofer Institute)는 잉크 대신 고분자 물질을 3D 프린터의 노즐로 한 방울씩 뿌리고 굳게 해 층을 쌓는 방법으로 인공혈관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사고나 질병으로 손상된 조직을 대체할 수 있는 인공조직을 개발하는 조직공학(tissue engineering)에서는 세포가 증식, 분화할 수 있는 지지체 역할을 해줄 스캐폴드(scaffold) 과정에서 3D 프린팅을 이용할 수 있다. 독일에서는 세포를 직접 인쇄해서 필요한 인공장기를 생산하는 3D 프린팅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다.
아울러 제조 공정이 복잡한 디지털 기기 부문에서도 3D 프린팅 가능한 제품 범위가 확대되고 있다. MP3, 카메라뿐만 아니라 통신, 비행 기능 등을 갖춘 첨단기기도 찍어내듯이 인쇄 가능해진 것이다. 최근 네덜란드 디자이너 야스퍼 판 로에넨(Jasper van Loenen)는 'DIY 제작도구'를 통해 소형 무인항공기(UAV)를 만드는 시스템을 선보여 항공업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야스퍼 판 로에넨(Jasper van Loenen)이라는 네덜란드 독립 디자이너가 'DIY 제작도구'를 통해 제작한 소형 무인항공기(UAV).(사진=유튜브 캡쳐)
◇글로벌경제 지각변동..대규모 구조조정 우려
3D 프린팅은 새로운 생산기술인 동시에 글로벌 제조업의 구조조정을 유발하는 핵심 요인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제조업은 저렴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중국을 포함한 동남아 등 제3세계로 거점이 이전돼 왔지만 3D 프린터가 활성화될 경우 값싼 노동력을 찾아 해외 생산기지를 건설해야 할 이유가 없어진다.
지난 2002년 기준 중국의 시간당 임금은 58센트로 미국 생산직 임금의 2.1%에 불과해 당시 수많은 글로벌 기업들이 중국에 생산기지를 세웠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최근 이들 지역에서 임금이 빠르게 상승하면서 저렴한 노동력에 기반한 가격경쟁 우위가 희석되고 있다.
이에 미국 등 선진국들은 자신들의 강점인 R & D 역량을 중심으로 차세대 생산기술을 확보해 자국의 제조업 부흥을 이끌어 나가는 분위기다. 미국 오바마 대통령은 올해 연두교서에서도 제조업 부흥이 정부의 최우선 정책 과제임을 재차 강조했다. 주요 다국적 기업들의 'U턴'이 본격화될 움직임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이는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국가 간 무역에도 중대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요소로 지목된다. 영국의 물류시장 조사업체 트랜스포트 인텔리전스(Transport Intelligence)는 올 초 발표한 보고서에서 "3D 프린팅과 같은 차세대 생산기술이 오늘날 생산과 소비가 분리되었던 글로벌화를 역으로 돌려놓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물론 이 같은 변혁이 가져올 환경적 변화에 대한 우려도 많다. 무엇보다 산업구조 개편이 불가피해지면서 그동안 제조기업들이 창출해온 고용, 지역경제 활성화 등의 순기능을 마비시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3D 프린터 보급이 가속화될 경우 자동차, 전자제품, 조선해양 등 각 산업 부문에 특화된 거점도시들이 '슬럼화'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김기원 방송통신대 교수는 "자본주의의 본질은 창조적 파괴다. 19세기 처음으로 기계가 등장했던 영국에서도 '러다이트 운동'(일종의 반동)이 벌어졌지만 결국은 의미가 없었다"며 "일자리라는 건 고정돼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방식으로 창출 가능하다. 관건은 노동자들을 재교육하고 사회적으로 보호하는 문제에 발생할 수 있는 비용"이라고 말했다. (계속)
황민규 기자 feis1@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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