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발의 어르신들은 미간을 찡그리며 두꺼운 돋보기 너머로 보이는 선택지에 하나하나 표시를 하기 시작했다. "맞아.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야. 자식들 부담만 주지." 김영정(86)씨는 옆자리 친구에게 두런두런 말을 건네며 자신의 장례를 위한 '사전(事前) 장례 의향서'를 썼다.
11일 오후 서울 성북구 정릉교회 부설 정릉평생대학. 330㎡(100평) 크기의 예배실은 이날 '사전 장례 의향서' 특강을 들으러 온 노인 150여명으로 자리가 꽉 찼다. 사전 장례 의향서란 부고(訃告) 범위, 장례 형식, 부의금·조화(弔花)를 받을지, 염습·수의·관 선택, 화장·매장 등 장례 방식과 장소 등 당부 사항을 미리 적어놓아 자녀들에게 전하는 문서다.
↑ [조선일보]11일 오후 서울 성북구 정릉교회 부설 정릉평생대학에서 어르신 150여명이 ‘사전 장례 의향서’ 강연을 들은 다음, 사전 장례 의향서를 작성하기 위해 문서를 꼼꼼히 살펴보고 있다. /이진한 기자
"성경 문구를 빽빽이 적어놓은 수의(壽衣)는 1200만원짜리도 있답니다. 화장(火葬)하면 하루도 못 입는 옷이 이렇게 비싸요." 강의를 맡은 고령 전문가단체 '골든에이지포럼'의 이광영 상임이사가 이처럼 말하자 일제히 "우와~" 하는 탄식이 쏟아졌다. 이 이사가 "장례식이 사자(死者)에 대한 추모는 뒷전이고, 살아 있는 자식들 세(勢) 과시 장소처럼 느껴지는 것이 문제"라고 하자 노인들은 "맞아. 맞아"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40여분간 강의가 끝난 뒤 이 이사가 사전 장례 의향서를 나눠주며 작성하는 방법을 알려주자 노인들 반응이 뜨거웠다. 이날 강연에 참석한 이선자(69)씨는 "자식들이 부모 장례 절차를 결정하기 어려우니 내가 미리 결정해 놓으면 자식들의 부담이 덜릴 것"이라고 했다.
골든에이지포럼(회장 김일순), 나눔국민운동본부(대표 손봉호), 건전가정의례실천협의회(회장 김관희), 마음건강연구소(대표 변성식), 생사의례문화연구원(원장 강동구) 등 5개 단체는 최근 모임을 갖고 건전한 장례문화를 확산하기 위해 사전 장례 의향서 쓰기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이 캠페인에 동참한 변성식 마음건강연구소 대표는 "그동안 온라인으로 사전 장례 의향서 문안을 내려받은 사람이 작년 11월 이후 4400여명에 이르고, 강의를 통해서도 1600명가량이 동참하는 등 지금까지 6000여명이 '작은 장례식'에 공감해 사전 장례 의향서를 작성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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